니콘 D5000. 결국 사버렸다. 돈도 없으면서.
어떤 모델을 살지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알게 된 사실이지만, DSLR이라는 건 정말 돈 잡아먹는 괴물이다.
열심히 들고 다니면서 사진 찍어야겠다. 본전 찾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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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11/22 큰맘먹고 지른 DSLR
- 2009/11/08 [펌] 박찬호가 노모를 줘패란 말이냐?
- 2009/11/05 마이클 잭슨 : This is It
- 2009/10/27 트랜스포머 2 (2)
- 2009/08/18 [펌] “모든 국민이 왜 영어를 유창하게 잘해야 하느냐” (1)
- 2009/08/08 이제동 지못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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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6/26 출발 (4)
- 2009/06/21 포스가 함께 하길
- 2009/06/18 검찰의 PD수첩 사건 수사결과 발표에 대한 단상 (3)
- 2009/06/10 서울대학교 학생 시국선언
- 2009/06/07 봉준호의 [마더]
- 2009/05/27 허위채무 부담에 따른 가등기 경료행위가 강제집행면탈죄를 구성하는지 여부 (1)
- 2009/05/22 가인(街人) 김병로를 보며 책임을 생각하다 (1)
- 2009/05/18 이것저것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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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4/22 "부모에게서 독립해 연애와 여행을 하시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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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4/08 청바지 (2)
큰맘먹고 지른 DSLR
[펌] 박찬호가 노모를 줘패란 말이냐?
기사 작성일은 1999년 9월 15일.
십 년이 지났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바뀐 건 많지 않다.
마이클 잭슨 : This is It

마이클 잭슨에 대해서, 음악과 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 영화를 보여 줬다고 치자.
당장에 그 사람은 눈을 휘둥그래져서 이렇게 물을 것이다.
"저 사람 대단한 사람이지? 한 가닥 하는 사람이지?"
노래 좀 한다고 뻐기는 자, 춤 좀 춘다고 으스대는 자, 공연 좀 해 봤다고 재는 자.
그 시건방진 입을 다물라.
이런 영화로나마 그를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제 그가 없어서 너무나 안타깝다.
This Is It.
금방 [트랜스포머 2 : 패자의 역습] 관람을 마쳤다.
이렇게 요란하게 때려 부수고 시끄럽게 쿵쾅거리는데도 지루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자연스럽게 우러나와야 그게 감정이고 또 감동인 거지, 억지로 목구멍 속으로 밀어넣는다고 감정이 생기는 게 아니다.
메간 폭스한테 핫팬츠 입혀 놓고 일부러 야한 앵글로 줌을 당긴다고 섹시함이 느껴지는 게 아니요, 황혼을 배경으로 깔고 슬로모션으로 폭발 장면을 잡는다고 웅장함이 느껴지는 게 아니고, 쓰러진 주인공 주변에 침통한 표정으로 오열하는 가족, 애인, 친구들을 늘어놓고 (또) 슬로모션으로 그 주변을 빙빙 돌린다고 감동이 생기는 게 아니다.
볼거리 뿐인 영화다.
끝내주게 멋진 장면은 분명 군데군데 등장하지만, 그뿐이라면 두시간 반이 아니라 십분짜리 뮤직비디오로 만드는 게 이래저래 경제적일 터.

웨돔 분수광장 바닥을 장식했던 범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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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elysole
2009/10/29 15:47Welcome back~
다른 건 잘 기억 안나지만 여자 모양한 로봇은 좀 오버였던 듯~
글구 헌재는 방송법이 유효라고 결정해 버렸네~
[펌] “모든 국민이 왜 영어를 유창하게 잘해야 하느냐”
집은 시끌벅적하다. 형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친척들이 모두 모였다.
형수님은 한복 곱게 차려 입으시고는 외숙모들한테 붙잡혀 있고, 형은 안절부절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고.
둘 다 얼굴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
검찰시보가 드디어 끝났다. 월요일 하루만 남았다.
두 달,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참 길었고 배운 점도 많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끝나서 다행이다. 이제 머릿속엔 온통 유럽 생각뿐이다.
김동률의 '출발' 틀어놓고 한껏 여행 떠나기 전의 설렘을 만끽하는 중이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책도 보면서 계획도 슬슬 세워야 하는데.
일단 무작정 비행기를 타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은, 막연히 낙관적인 생각뿐이다.
남은 건 교체를 맡겨 놓은 아이팟이 화요일까지는 준비가 되는 것뿐.
(아이팟 없으면 여행길은 진짜 큰일이다 -_-)
가자, 유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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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9/06/28 04:22오빠 저 오랜만에 왔어요 ㅋㅋ
와 그런데 유럽 오시나요? 독일은 안들르시는지-
하긴 유럽 여행 오는 사람들중에 근처에 오는 사람을 못봤습니다만;
날씨도 더운데 즐겁게 건강히 여행 잘 하시기를요- :)-
onecent
2009/06/30 21:47오랜만이야_ㅎㅎ
연수원에서 전문기관연수를 해외로 가서 이번에 유럽에 가게 됐어. 근데 안타깝게도 독일에 들르지는 않고_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그리고 프랑스에 가는데 파리에 오래 있을거야.
독일에도 가봐야 하는데. 앞으로 기회가 있겠지_
너도 날 더운데 건강 조심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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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
2009/06/29 10:44ㅎㅎ 좋겠구먼.
예전에도 말했듯이 일단 일 시작하면 해외여행은 맘처럼 쉽게 갈 수 없게 되지. 잘 다녀오쇼.
난 화요일에 딸딸이 아빠될 예정 ^^
검찰의 PD수첩 사건 수사결과 발표에 대한 단상
이 부분에서 남은 쟁점은 공적 관심사안에 대한 보도라는 점에서 "악의적이거나 현저히 상당성을 잃은 보도가 아닌 한 위법성이 조각된다"라는 법리에 따라 위법성이 조각될 수 있을지일 뿐임.
그러나 검찰 수사결과 발표만 놓고 봤을 때, 다툼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조각되기 힘들어 보임.
2. 업무방해죄 부분은, 위계 또는 위력에 의한 업무방해행위가 있는지 약간 의문.
명예훼손죄 부분보다는 좀 덜 명확하다고 생각함.
3. 이 사건과 관련성이 극히 적다고 판단되는, 사적인 대화임이 명백한 이메일을 공개한 것은 결코 적절하지 않았다고 생각됨. 검찰 입장에서 봐도, 수사결과에 대해 괜히 욕먹을 빌미만 제공한 셈이 되었다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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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
2009/06/19 17:10정확한 사실관계는 모르겠지만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것이 맞나?
검찰의 이메일 공개는 적어도 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죄 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않은지?;;
글구 구성요건에 기계적으로는 맞추어 넣을 수 있다고 해도 정책을 비판한 언론에 대하여 담당 공무원 명예 훼손되었다고 기소하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있나 모르겠네. 예전에도 그랬겠지만, 요즘은 법률가라는 직업이 참 치졸하게 느껴지는군.-
onecent
2009/06/19 21:07음..검찰 수사결과 발표문을 한번 읽어봐. 대검 홈페이지에서 구할 수 있어. 최소한 그 내용을 보면 구성요건해당성은 인정된다고 보는 게 맞는듯.
검찰의 이메일 공개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구성요건에 해당한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그것과 피디들의 명예훼손죄 성부와는 별개의 문제지.
그리고, 정책비판언론에 대해서 정부기관장이 자기 명예가 훼손됐다고 대뜸 고소한 것부터가 코메디라는 데에도 동의해. 사실 검찰이나 법원 같은 사법기관에 오지 말아야 할 문제가 자꾸 넘어오는 게 사법기관 입장에서는 제일 난감한 문제라고 생각함. 요즘 검찰시보하면서 느끼는거지만.. 많은 사람들이 '잘못한 사람은 모조리 형사처벌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 잘못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는 거잖아? 도덕적 비난가능성만 있는 잘못도 있고, 불법행위책임은 인정되지만 형사처벌할 정도는 아닌 잘못도 있고, 형사처벌해야 하는 잘못도 있는 거지. 근데 사람들은 조금의 잘못만 있어도 죄다 검찰에 고소부터 한단 말이야(이명박 욕을 만평에 집어넣은 만화가를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로 고소한 것도 바로 이런 경우겠지).
나는 누구보다도 피디수첩 제작진의 사실왜곡이 없었다고 믿고 싶어한 사람이야. 그리고 실제로 미국산 쇠고기와 광우병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해서 검찰이 이야기한 것처럼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는 건 사실이 아닐지도 몰라.(다음 기사가 참조가 됨;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619151210)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도 의도적인 오역이 있었던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고(내가 많이 실망한 것도 바로 이 오역 부분이지), 허위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내용도 있다고 봐(법원의 정정보도사건 판결도 마찬가지 의견이었지).
그렇게까지 오역을 하고 심하게 과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송이었을 텐데 너무 무리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울 따름이지.
다투기에 따라서, 그리고 법정에서 추가로 밝혀질 사실관계에 따라서 위법성이 조각될 여지는 있다고 보이니까, 그리고 검찰 수사결과 발표는 일방 당사자의 입장일 뿐이니까, 좀더 사태의 추이를 지켜봐야겠지.
법은 사회현상을 절대로 다 규율할 수 없어.
이 세계가 모래밭이라면, 법으로 그 세계를 규율하려 드는 것은 맨손으로 그 모래를 움켜뜨려는 것과 같겠지.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는 게 대부분이야.
그런 의미에서 사법부의 역할은 지극히 제한적이야. 더구나 형사 사법기관은 더 말할 나위도 없어.
토론을 통해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인데도 토론할 줄 모르는 사람들, 도무지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기울이고 양보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그 문제를 죄다 검찰과 법원(그리고 헌재)에 떠넘겨 놓고는 검찰과 법원의 입만 쳐다보고 있어. 그게 오늘날 법률가들의 진정한 비극이 아닐까.
그 때문에 나는 지금이 어느 때보다도 우리 나라의 법률가들에게 사법소극주의적 사고방식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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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
2009/06/22 23:10나도 한번 구해서 읽어 봐야겠네. 신문 기사만으로 보는 경우에도 약간 의도적인 오역이 있는 것 같다는 기사가 실려서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좀 걱정이 되었었는데, 사실관계상 그렇게 인정될 가능성이 좀 꽤 있나보군...아쉽군. 검찰에서 이메일 공개한 것으로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검찰이나 정부가 의도한 바를 이루었다는 생각이 드네. 법원에서 무죄가 나와도 어차피 일부 사람들은 법원이 좌파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정치의 권위가 없으니 모든 것을 사법기관의 권위를 빌어 처리하고자 하다보니 지금과 같은 사법만능주의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 삼성 판결을 보면서 법원에 대한 기대도 많이 접었지만, 그래도 법원이 검찰보다 조금은 낫다는 생각은 아직은 유효한 것 같아.
검찰이 기소여부를 결정하는 권한이 얼마나 막강하고 또 한편으로는 위험한 것인지 요즘 정말 실감하고 있지. 자의적 검찰권의 행사, 있는 자와 없는 자에 대한 불공평한 검찰권 행사가 만연하고 있는데(예컨대, 공정택 사건과 노무현 또는 주경복 사건, 용산사건/경찰의 시위대 폭행사건과 시위대의 경찰에 대한 폭행/교통방해/집시법 위반 사건 등) 이러한 불공정한 검찰권 행사 자체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지고, 사회 안정을 위해서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는 말을 꺼리낌 없이 내뱉을 수 있는 사회가 된다는 사실이 더 아쉬운 것 같아.
암튼, 주로 한쪽 신문기사만을 보다보니 이건처럼 fact를 더 객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원칙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는군.
개인적인 바램으로는 검찰은 사법소극주의, 법원은 진보적 의미에서의 사법적극주의가 필요하지 않나 싶군.
Good night~
서울대학교 학생 시국선언
나는 봉준호가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의 현 상황과 문제점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연출한 영화를 나는 세 편밖에 보지 못했다. [살인의 추억], [괴물] 그리고 최근 개봉한 [마더].
그러나 위 세 편의 영화에는 일관된 문제의식이 반영되어 있으며, 나는 그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그 문제의식은 바로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이다.
봉준호의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언제나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그들이 맞닥뜨린 문제는 그들 혼자서(마더), 또는 둘이서(살인의 추억), 또는 일가족만으로는(괴물) 해결하기에 너무나도 벅찬 것들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 문제들은 그들이 알아서 해결해야만 하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문제들은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며, 그 해결을 위해 사회적인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연쇄강간살인범을 잡는 것, 그것은 두 명의 형사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수사기관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현서를 납치해 간 것은 한강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온(봉준호의 비유를 그대로 따라간다면_여기엔 미군이 한몫했다) 괴물이었다. 그리고 그 괴물은 비단 현서뿐만 아니라 모든 서울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가가 나서서 괴물을 잡아야 옳다.
여고생 살인사건의 진범을 잡는 것 또한 마더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 아니다. 국가의 수사기관이 나서서 진범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 이처럼 개개인이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사회적 시스템은, 언제나 실패하고 만다.
연쇄살인범의 신발자국과 같은 중요한 증거는, 현장보존과 같은 너무나도 기본적인 절차 미숙 때문에 무참히 사라져 버린다. 또 한 사람의 희생자를 막기 위해 경찰력 증원을 요청하지만, 시위 진압에 이미 경찰력을 모두 동원한 상부에서는 증원 요청을 거절한다. 수사 시스템은 군홧발로 엄한 피의자를 두들겨패는 식으로만 작동한다. 그리고 그러한 식의 시스템 운용은 무수한 희생자만을 낳고, 문제 해결에는 실패한다. 너무나도 범인을 잡고 싶었던 형사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혐의를 받던 바보 피의자는 자살한다. 군홧발로 그 바보 피의자를 두들겨패던 형사는 그 군화를 신을 오른발을 잃고 만다.
국가는, 느닷없이 나타나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괴물을 잡는 것보다는, 명확히 검증도 되지 않은, 괴물이 보유하고 있다고 의심되는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는 데 더 관심이 있다. 그토록 방역에는 결벽증과 같은 반응을 보이면서도, 정작 괴물을 잡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이 괴물을 잡는다고 뿌린 오렌지색 가루는, 그 오렌지색 가루 살포와 정부의 대응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던 사람들을 진압하고 있던 경찰관의 목숨은 앗아가지만 정작 괴물을 죽이지는 못한다. 괴물을 죽이는 건 현서네 가족이다. 그나마도 이미 현서는 죽은 뒤에. 심지어 그 난리를 겪고 나서도, 현서 대신 새로 생긴 아들을 지키는 건 국가가 아니다. 여전히 송강호는 총을 곁에 두고 스스로 자신의 가족을 지켜야 한다(마지막 장면).
[마더]에서도 경찰, 변호사, 검사 등 진범을 잡기 위해서, 그리고 무고한 사람이 범인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서 마련되어 있는 사회적 시스템은 전부 다 실패하고 만다. 경찰은 바보 피의자를 두고 엉터리 자백을 받아내고, 변호사는 상담 한 번 제대로 하지 않고 연줄을 이용해 유야무야 사건을 처리하려 한다. 검사는 변호사가 사 주는 술을 처먹고 술상에 머리를 처박고 있을 뿐이다. 피해자의 주변 인물을 조사하고, 피해자의 행적을 추적하는 등 응당 수사기관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국가에 의해 수사권이 부여되어 있는 수사기관이 아니라, 아무런 권한도 없고 아무런 힘도 없는 마더 뿐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번에도 문제의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번에도 희생자들은 생겨난다. 모든 걸 다 제껴놓고 나의 안위를 위해 고군분투해줄, (한국의) 엄마가 없는 어떤 사람, 그리고 마더까지도. 마더와 도준이의 밥상은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위 세 영화에서 모두, 주인공들은 정말 진심으로, 온 힘을 다해 노력한다.
보는 사람들은 그들이 정말 성공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그러나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은 없다. 도와 주라고 우리가 그 자리에 앉혀 놓은 사람들은 그들을 돕지 않는다.
정말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그리고 위 세 영화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은, 다른 사람들이 주인공의 말을 통 들어 주질 않는다는 것이다.
소통의 부재. 다른 사람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고, 자신의 편견만으로 대화를 이끄는 사람들.
송강호가 [괴물]에서 마취약의 기운과 처절하게 싸우면서 억지로 입을 움직여 간신히 내뱉던 말이 뭐였는지 기억나는가? "왜 아무도 내 말을 안 들어 주는거야"였다. [괴물]을 두고 반미영화네 뭐네 열심히 떠들지만, 내게는 저 말이 가장 절절하게 와 닿았다.
그렇다. 지금 여기,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바로 그런 곳이다.
어느 누구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고("엄마, 아무도 믿지 마."). 문제 해결을 혼자 힘으로 할 수밖에 없는 사회.
그렇게 타인에 대한 신뢰가 증발하고 사회적 안전망이 사라진 대한민국에서 나를 지켜 주는 건 결국 가족 뿐이다.
그리고 가족들끼리 지켜 주는 데 있어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건 엄마가 아들 지켜주는 때이다. 기묘하게도 [괴물]에선, 바로 이 가장 강력한 연대관계가 쏙 빠져있다. 엄마가 아닌 사람들(아빠, 할아버지, 삼촌, 고모)이 아들이 아닌 사람(여자아이)을 지키내기 위해 힘을 합친다. [괴물]의 가족들보다 [마더]의 엄마가 결과적으로 조금이나마 더 문제해결에 성공하는 건 우연일까? 그게 우연이든 감독의 의도든 간에, 우리나라에서 아들 살리려고 덤비는 엄마를 당할 사람이 없는 건 분명하다.
개인 스스로, 또는 가족들끼리 문제를 해결하게끔 내버려 두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결국 문제 해결에 실패하고 만다. 그들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태생부터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문제이기도 하고, 애초부터 혼자 힘으론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혼자서 해결하기 힘든 문제도 힘을 합쳐서 해결하기 위해, 바로 그것을 위해 우리는 '국가'란 놈을 만든 것 아닌가? 연쇄강간살인범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납치된 딸을 무사히 되찾기 위해, 아들이 별다른 증거도 없이 살인범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경찰, 검찰, 군대,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를 만들고, 무죄추정의 원칙이니 신체의 자유니 하는 것을 헌법에 적어 놓은 것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 놓은 국가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우리가, 엄마가, 아빠할아버지고모삼촌이 나서야 하는가? 그것도 무력하기 짝이 없는 공기총, 양궁, 화염병, 쇠파이프를 들고서? 대포와 탱크, 기관총과 미사일은 어디 갔는가?
봉준호는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문제를 던지고 있다.
[살인의 추억]은, 시스템이 처참하게 실패했던, 명백하게 국가가 사람들을 위해 작동하지 않던 독재정권 시절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봉준호가 서 있는 시점은 그 때가 아니라 지금이다. 경찰 일을 그만두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송강호의 모습을 영화 막판에서 보여 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리고 제목에 '추억'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영화는 일종의 회고담이다. 봉준호는 그 시절을 오늘날에 서서 되돌아보고 있다.
거기서 그냥 끝났다면, 이제 우리 사회는 달라졌으니까, 독재정권은 없어졌으니까, 더 이상은 군홧발로 피의자를 두들겨패는 식으로 피의자를 신문하지는 않으니까, 이제는 법의학도 발전하고 수사기법도 과학화되었으니까, 봉준호는 그저 과거 우리 사회가 지녔던 문제점을 되새겨 보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말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괴물]이 나왔다.
[괴물]에서 봉준호는 말한다. 달라지지 않았다. 독재정권이 없어졌을지는 몰라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지키게끔 내모는 곳이다. 사람들이 한강에 뛰어들게끔 내모는 사회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을 내몰다간, 뛰어내린 사람들을 먹고 자란 괴물이 한강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그나마도 이제껏 그 괴물을 잡은 것은 화염병과 쇠파이프였다. 그러나 그런 식의 대응은 너무나도 희생이 크지 않았던가. 다음에 괴물이 튀어나오면, 그 때는 어쩔 것인가. 이것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살인의 추억]을 [괴물]보다 더 재미있게 봤음에도 불구하고, 백 년 후 이 시대의 진정한 고전으로 평가받을 만한 영화는 [괴물]이라고 생각한다. 한 시대의 문제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 주는 영화, 그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영화('재밌게 잘 찍은 영화'라는 점도 분명히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괴물의 CG가 어설프니 어쩌네 하는 이야기는, 지극히 부차적인 문제다. CG의 질은 영화의 훌륭함을 결정하는 데 아주아주 미약한 영향력밖에 없다(어이 심감독님, 당신한테 하는 이야깁니다).
[마더]는, [괴물]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의 큰 틀을 따라가면서도, 오늘날 우리 사회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고유한 상황 - 엄마와 아들 간의 강력한, 유별난 유대관계 - 을 새로이 추가해서 보여 준다. 엄마와 아들 간의 유별난 유대관계가 정확하게 어떠한 사회적 문제상황을 구성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으므로 길게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의 특징적 상황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낳는 현상들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한번 고민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마더] 또한 훌륭한 영화다.
봉준호의 문제의식은 결국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나타나는 상황이 제기하는 문제와 동일한 것이다.
개인의 초인적 노력을 강요하는 사회.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사회. 그래서 피곤하고, 살기 힘든 사회.
[우생순]은 그러한 사회를 기적적으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헤쳐 나가는 극히 소수의 영웅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주는 영화다. 그들의 노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들의 눈물과 땀이 얼마나 멋있는지.
한편 봉준호는 그러한 사회 속에서 실패하고 마는 나머지 절대 다수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들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어쩌지 못하고 마는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얼마나 분통이 터지는 일인지.
[마더]를 보면서 나는 계속해서 [괴물]이 떠올랐고, 또 [바벨]이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는 얼마나 다른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있는가. 그들의 말을 우리는 과연 듣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이 서로가 하는 말을 조금만 더 귀담아 듣는다면, '그럴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다면 좀 더 살 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혈연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들도 신뢰의 끈으로 묶고, 그렇게 해서 거대한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을 위하여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허위채무 부담에 따른 가등기 경료행위가 강제집행면탈죄를 구성하는지 여부
1. 허위채무부담과 가등기의 종류
허위채무를 부담하고 가등기를 경료하여 주는 경우, 부담하는 허위채무의 종류에 따라서 경료되는 가등기의 법적 성질이 달라진다. 허위로 부동산에 관한 매매계약을 가장하여 소유권이전등기의무를 부담하는 경우에는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 보전을 위한 가등기(이하 ‘보전가등기’라 한다)를 경료하게 될 것이고, 허위로 금전채무를 부담하는 경우에는 채무 담보를 위한 가등기(이하 ‘담보가등기’라 한다)를 경료하게 될 것이다.
2. 가등기 경료행위가 ‘허위양도’에 해당하는지 여부
허위로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그에 따른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을 보전하기 위하여 보전가등기를 경료한 경우, 본등기가 경료되지 않은 이상 부동산의 ‘양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으므로, 가등기를 경료하는 행위는 강제집행면탈죄에서 말하는 ‘허위양도’에 해당할 여지는 없으며 오로지 ‘허위의 채무 부담’에 해당할 뿐이다. 따라서 이 문제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하는 것은 가등기 경료행위가 아니라 가등기의 등기원인이 되는 허위채무부담행위이다.
3. 허위채무부담행위가 강제집행면탈죄를 구성하기 위한 요건
그런데 허위로 채무를 부담하는 행위가 언제나 강제집행면탈죄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재산을 은닉, 손괴, 허위양도 또는 허위의 채무를 부담하여 채권자를 해할 것’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즉, 허위로 채무를 부담하는 행위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허위채무부담행위가 실제로 채권자의 강제집행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허위채무부담행위가 채권자의 강제집행에 해를 끼치는지 여부는 부담하는 허위채무의 종류와 채권자의 채권의 종류에 따라서 달라진다.
즉, 만약 채권자의 권리가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인 경우, 채무자가 허위로 금전채무를 부담하고 이를 담보하기 위하여 담보가등기를 경료하여 주었다고 하더라도, 채권자의 권리는 이전등기청구권이며 금전채권이 아니므로 채무자가 허위의 금전채무를 부담한 사실만으로는 이전등기청구권의 집행에 어떠한 침해가 된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대법원 1982. 5. 25. 선고 81도3136 판결 참조).
결국 허위채무부담행위(그리고 가등기를 경료하는 행위)가 강제집행면탈죄를 구성하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채권자의 권리와 허위로 부담한 채무의 종류에 따라 발생하는 네 가지 경우의 수를 구분하여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4. 유형별 검토
가. 채권자의 권리가 금전채권인 경우
(1) 소유권이전등기의무를 허위로 부담한 경우(보전가등기 경료)
(가) 판례 : 없음
(나) 검토
단순히 소유권이전등기의무를 허위로 부담한 것만으로는 금전채권의 강제집행에 어떠한 장애가 되지 않으므로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한다고 할 수 없다(소유권이전등기의무를 허위로 부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소유권이전등기를 경료해 주기까지 한다면 채무자의 책임재산을 감소시켜 강제집행에 실질적인 해를 끼치게 될 것이나, 이 경우는 허위양도에 의한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하므로 처벌이 가능하다). 그러나 소유권이전등기의무를 허위로 부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보전을 위한 보전가등기까지 경료한 경우에는 금전채권의 강제집행에 장애를 발생시킨다고 할 수 있다. 보전가등기가 경료된 이후에 강제경매 개시등기가 이루어지고 경매절차가 진행되는 경우, 보전가등기는 경매로 부동산을 취득한 매수인이 인수하는 부담이 되고, 따라서 보전가등기의 존재는 경매목적물의 가격을 산정하는 데 있어서도 고려된다. 그러므로 보전가등기가 존재하는 경우 경매절차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매수를 꺼리게 되고, 결국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서 경매가 이루어지는 결과가 되어 채권자들이 채권의 만족을 제대로 얻지 못하게 될 위험이 크다.
문제는 이처럼 허위채무를 부담하는 행위와 그에 따라 가등기까지 경료하는 행위를 달리 취급하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인데,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보전가등기가 경료되었는지 여부에 따라서 금전채권의 강제집행에 미치는 효과가 현저히 다르므로 양자를 구별해서 취급하는 것이 충분히 설득력을 얻는다. 대법원 또한 “피고인이 위 판시와 같은 허위의 금전채무를 부담한 사실만으로는 위 채권자들의 지분이전등기청구권의 집행에 어떠한 침해가 된다고 볼 수 없다. 다만 위 허위채무부담에 따라 경료한 가등기가 위 채권자들의 권리실현에 장애가 된다면 별문제이나…”라고 설시하여 단순 허위채무부담행위와 허위채무부담에 이은 가등기 경료행위가 강제집행면탈죄의 성립여부와 관련하여 달리 취급될 수 있음을 언급한 바 있다.
결론적으로, 채권자의 권리가 금전채권인 경우, 허위로 소유권이전등기를 부담하는 행위만으로는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하지 않으나, 소유권이전등기를 허위로 부담하고 그 보전을 위하여 가등기까지 경료한 때에는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한다고 보아야 한다.
(2) 금전채무를 허위로 부담한 경우(담보가등기 경료)
(가) 판례 :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한다.
대법원 1996. 1. 26. 선고 95도2526 판결, 대법원 2008. 6. 26. 선고 2008도3184 판결.
(나) 검토
금전채권에 의한 강제집행은 채무자의 재산에 대한 강제경매 등의 환가절차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고, 채무자에 대한 다른 채권자들도 경매절차에 참여하여 배당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므로 허위로 금전채무를 부담할 경우 결과적으로는 정당한 채권자가 배당받을 금액이 줄어들게 된다. 따라서 허위로 금전채무를 부담하는 행위는 금전채권의 채권자의 강제집행을 해할 위험이 발생한다. 만약 허위의 금전채무부담행위에 더하여 그 채무를 담보하기 위한 담보가등기까지 설정하는 경우, 담보가등기는 저당권과 마찬가지로 우선변제권이 인정되기 때문에 채권자의 강제집행에 해를 끼치는 정도가 더 크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허위채무부담’ 요건과 ‘채권자를 해할 것’의 요건이 모두 충족되므로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한다.
나. 채권자의 권리가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인 경우
(1) 소유권이전등기의무를 허위로 부담한 경우(보전가등기 경료)
(가) 판례 :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 위 판시중의 가등기는 그것이 비록 그 판시와 같은 통모에 의하여 가장한 매매예약을 원인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할지라도 … 위 가등기에 순위보전의 효력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전술 매매예약상의 청구권 보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던 만큼 이를 직접적으로 甲(채권자)의 그 판시와 같은 청구권에 기한 강제집행을 불능케 하는 사유에 해당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는 바이니…” (대법원 1967. 12. 18. 선고 67도1166 판결)
(나) 검토
소유권이전등기의무의 강제집행을 면탈하기 위하여 타인에게 부동산을 허위로 매도하고(이중매매 상황이 된다) 그 타인에게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 보전을 위한 가등기를 경료하여 주었다고 하더라도, 본래의 채권자는 자신의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에 기한 강제집행을 완료할 수 있다. 즉, 채권자는 소유권이전등기청구소송에서 승소확정판결을 받아 그 판결을 이용하여 단독으로 소유권이전등기를 경료할 수 있으며, 타인 명의로 보전가등기가 경료되어 있는지 여부는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의 집행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허위채무부담’ 요건은 충족되나 ‘채권자를 해할 것’ 요건이 충족되지 않아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물론, 이후에 가등기에 기한 본등기가 경료된다면 채권자 명의의 소유권이전등기는 직권 말소되겠지만, 그 경우에는 본등기 경료행위를 허위양도에 의한 강제집행면탈죄로 처벌하면 될 것이다.
(2) 금전채무를 허위로 부담한 경우(담보가등기 경료)
(가) 판례 :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채권자인 소외 甲의 권리는 이 사건 토지의 1382/3951 지분에 대한 이전등기청구권이며 금전채권이 아니므로 피고인이 위 판시와 같은 허위의 금전채무를 부담한 사실만으로는 위 채권자들의 지분이전등기청구권의 집행에 어떠한 침해가 된다고 볼 수 없다. 다만 위 허위채무부담에 따라 경료한 가등기가 위 채권자들의 권리실현에 장애가 된다면 별문제이나 가등기는 본래 본등기를 위한 순위보전의 효력밖에 없는 것이므로 가등기가 경료된 것만으로는 위 채권자들의 지분이전등기청구권의 집행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이다.” (대법원 1982. 5. 25. 선고 81도3136 판결)
(나) 검토
위 대법원 판결의 설시와 같이, 채권자의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에 대한 강제집행은 채권자 명의로 소유권이전등기를 경료하는 것으로 완료되므로 채무자가 허위의 금전채무를 아무리 부담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의 강제집행에 대한 장애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채권자를 해할 것’ 요건이 충족되지 않아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가인(街人) 김병로를 보며 책임을 생각하다
책임은 사후적인 것이다. 행동규범을 세우는 것이 먼저 있고, 그 행동규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그 다음이고, 규범에 맞지 않은 행동이 벌어졌을 때 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맨 마지막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책임은 가장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규범을 세우는 것은 쉽다. 그에 맞춰서 행동하는 것은 그보다 어렵다. 그러나 규범에 맞춰 행동하지 못했을 때 이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이는 당장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분명하다. 생활계획표를 번지르르하게 짜 놓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극기, 인내, 근면성실 등 온갖 좋다는 단어는 죄다 좌우명으로 가져다 써서 벽에 걸어 놓는 것까지는 언제라도,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계획표에 따라 하루하루를 사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다. 벽에 아무리 극기라고 써 붙여 놔도 순간의 충동을 참지 못하고 지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계획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해 책임을 지는 일이라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책임은 이처럼 너무나 어려운 것이지만, 한편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궁극적으로 우리가 사는 사회를 지탱해 나가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것이다. 사람들이 올바른 것으로, 가치있는 것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로운 것으로 생각하고 합의하여 만들어낸 규범들(근대 국가에서는 ‘법률’이 가장 대표적인 형태이다)은, 책임이 없다면 한갓 공허한 외침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규범은 그것이 지켜질 때에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규범을 지키는 일은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지움으로써만 가능하다. 규범을 어기는 사람들 어느 누구도 그에 따른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여기서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규범이 장기적인 안목과 합리적인 양보에 따른 타협의 산물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종이에 훌륭한 글귀를 써서 걸어두는 것은 쉽다. 사람들이 둘러앉아서 서로 차분하게 의논하고 토론해서 규범을 제정할 때는, 서로의 단기적인 이익을 조금씩 양보해서 가급적이면 모두가 이익이 되게끔 규범의 내용을 정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문제는 현실에서 순간순간의 갖가지 욕망과 충동에 맞닥뜨리게 되면 누구나 단기적인 이익만을 좇게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고, 이를 책임 없이 방치하다 보면 결국 사회는 모두가 매 순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사회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반면 모두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회는 결국 모두가 서로의 행위를 신뢰하는 사회가 된다.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고, 좋은 일을 한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는다는 신뢰가 구축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기꺼이 대의를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작은 이익을 희생한다. 약속을 깨는 사람은 반드시 그 댓가를 치른다는 신뢰가 구축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기꺼이 상대방과 거래를 하려고 하는 법이다.
가인 김병로의 삶은 구한말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격동의 해방기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의 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다. 덕분에 80여 년에 걸친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것은 곧 지금 현재의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규정한 지난 80여 년의 세월을 돌이켜보는 것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그 지난 세월은 ‘책임의 부재’라고 요약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일제에 협력하여 부를 축적하고 조선 사람들을 핍박했던 친일파는 그들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나마도 뒤늦게 구성된 반민특위의 활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일제시대 때 악명 높은 경찰이었던 노덕술 등을 체포하자 이들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질 새도 없이 도리어 경찰이 반민특위의 본부를 습격하고 특위요원들을 연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6∙25 전쟁 당시 ‘안심하라’는 공식발표를 믿고 서울에 남은 사람들을 뒤로하고 대통령과 정부 인사들은 도망가며 한강 다리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는 전세가 회복되자 돌아와서 그 때 떠나지 말라는 그들의 말을 믿은 사람들을 부역자로 몰아 처벌하려 들었다.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신체의 자유 등 온갖 기본권을 헌법에 버젓이 명시해 두고도 정작 정부에 반대하는 견해를 가진 자들은 그 입을 막고, 신문을 정간시키고, 부당구속과 고문을 일삼았다. 규범을 믿고 따른 자들은 합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다. 규범을 어긴 자들은 책임을 지기는커녕 그때그때마다 그들이 취했던 기회주의적 태도 덕에 득세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책임의식의 상실, 신뢰의 부재로 신음하고 있다면 그 큰 이유는 이러한 책임이 실종된 현대사에 있다고 생각한다. 책임이 사라진 지난 수십 년의 결과가 바로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사회, 영화 ‘괴물’에 잘 드러난 것처럼(괴물에게 잡혀간 현서를 필사적으로 찾는 건 결국 가족들이지, 국가는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다)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 아둥바둥 자기 앞가림을 해야만 겨우겨우 자기 이익을 지켜낼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책임 부재’의 현대사에서 가인 김병로 선생은 홀로 외로이 버티고 서 있는 단단한 바위 같다. 그는 밀려오는 기회주의의 파도 속에서도 원칙을 놓지 않는다. 일제의 탄압에도, 해방 후에는 이승만 독재 정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자신의 소신을 지킨다. 가인은 책임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해방 이후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것을 일관되게 못마땅해 했고, 결국 그 때문에 스스로 몸담았던 한민당에서 탈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법원장으로 있던 시절 반민특위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탄압에 맞서기도 하였다. 이승만 하야 후에도 “일제잔재의 경찰관을 재등용하지 말 것, 이승만정권에 추종아부한 각계 간부를 과도정부의 모든 기구에서 제거하고 숙청할 것”을 요구했고, “죄형법정주의, 형벌불소급의 원칙, 만인의 법 앞의 평등의 원칙 등 민주주의의 기본원리가 파괴된다”는 재야 법조인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이승만 정부 시절의 부정선거원흉과 부정축재자를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법원장까지 지냈던 가인이 과연 죄형법정주의, 형벌불소급의 원칙, 만인의 법 앞의 평등의 원칙을 등한시했던 것일까? 나는 가인이 사법, 나아가 법치의 핵심이 곧 책임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생애에 걸쳐 일관되게 그는 잘못했던 사람들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나 일제가 물러난 직후의 해방기나 이승만이 하야한 직후 과도정부가 들어선 시기와 같이, 표면적으로 나타난 큰 변화 탓에 사람들이 보다 세세한 책임추궁에 자칫 소홀해지기 쉬운 격변기일수록 가인은 앞장서서 책임의 확보를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널리 퍼져나가지 못하고 작은(그러나 힘찬) 외침으로만 남았다는 것이 무엇보다 안타깝다.
규범 그 자체, 더 나아가 그 규범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를 지탱하는 마지막 단계의 주춧돌이 책임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가인이 책임 확보를 본업으로 하는 사법부의 초대 수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안타까움이 즐거움보다 많은 우리 현대사에서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다. 그의 책임성은 비단 사회규범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개인적 규범의 차원, 즉 윤리와 도덕의 차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법관은 남들로부터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결벽에 가까운 청렴생활을 했던 것, 공과 사를 칼처럼 구분했던 것 등 그는 실로 도덕률에 어긋남이 없는 삶을 살았다. 그토록 스스로 엄격하게 책임을 지며 살았던 그였기에 사회 문제에 있어서도 책임을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렇기에 그가 내리는 판결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가인을 보며 책임을 생각했다. 그의 삶의 모습이 담긴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나도 책임을 지기로 결심했다. 그 때문에 독서감상문 제출일 새벽이 돼서야, 잠자리에 들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가인 김병로 평전’의 독서 과제가 주어지고 난 뒤 그 긴 여름 동안 차일피일 책 읽는 것을 미뤄 온 내 게으름에 대하여 책임을 지기 위해서다. 밤이 깊어지고 마감시한이 다가올수록 대충 넘겨 읽는 발췌독만으로 감상문을 작성하고자 하는 유혹에 계속 부딪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80평생을 통해 책임을 몸소 보여 준 사람의 삶에 대해서 무책임하게 글을 쓴다는 것은 너무나 자기모순적인 짓이었다. 지난 두 달 간의 나태함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는 작은 행위를 하는 것 - 책을 완독하고 생각을 정리해 글을 쓰는 것 -이 가인의 후배로서, 가인의 손길이 아직 남아 있는 법전을 뒤적거리며 살아갈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가인의 비문에는 “비록 몸은 가셔도 조국을 위한 기원은 살아 있어 길이 나라의 힘이 될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나라의 힘까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이 책을 읽으며 그가 내게 보여 준 모범이 길이 내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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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cent
2009/05/22 22:46이건, 연수원 1년차 때 여름방학 과제였던 '가인 김병로 평전' 서평으로 쓴 것이다.
글에도 썼듯이 제출일 당일 새벽에 졸린 눈을 비벼 가면서.
요즘 검찰시보를 하면서, 사람들을 수사하고 기소하고 구형을 하면서 새삼 '책임'이 화두로 떠올랐다.
전에 써 둔 것이 생각나서 곱씹어 보면서 생각이나 정리할 겸 여기에 올려놓는다.
일요일 저녁에 어둑어둑해지면 얼마나 우울한지. 이런 기분은 중학교 다닐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2. 지난 금요일, 근 1년만에 선생님께 안부 전화를 넣었다.
내가 스승의 날에 일부러 전화 거는 선생님은 한 분 뿐이다.
"요새 수업 어떠세요, 재미있으세요?" 라고 묻자 선생님께서는 기운빠진 목소리로 "재미없다"고 하셨다.
예전 내가 수업 들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모양이다.
선생님께서는 또 "예전 너희 때가 재미있었는데.."라고도 하셨다.
저도 재밌었어요, 그때. 두고두고 못 잊을만큼.
조만간 찾아뵙고 술이라도 한 잔 올려야겠다.
3. 토요일 아침만 되면 꼭두새벽에 귀신같이 일어나서 부리나케 일산으로 향한다.
그러다 보니 여느 때보다 훨씬 더 지하철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한 번 갈때마다 한 시간씩 걸리니까.
지하철에선 뭐라도 들여다보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으니, 그 동안 평소에 시간이 참 없는데도 책 읽은 건 되려 3, 4월보다 더 많은 것 같다.
먼저 [부자 아빠의 몰락]. 소득 불평등의 심화는 모든 사람들의 공공복리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논증해 내는 책이다. 논증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책이 분량도 얼마 안 되고 평이한 문체로 읽기 쉽게 쓰여졌다는 점이 가장 큰 미덕이다. 세상을 보는 눈을 좀 더 넓고 깨끗하게 틔워 준다. 시간 내서 일부러 읽어볼 만하다.
그리고 [쿠오바디스 한국경제]. 주류 언론의 일간지 사설을 읽으며 답답해진 가슴에 한 줄기 시원한 비를 뿌려주는 책이다. 건전한 상식으로, 합리적인 사고로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이 최소한 한 사람은 더 있다는 생각에 든든해진다. 이 책 역시 시론집이니만큼 평이하고 읽기 쉬운 문체로 되어 있어 부담도 적다. 반면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는 주요 문제들에 대하여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날카로운 분석을 보여 준다. 부동산 문제에 대한 설득력 있는 분석과 종부세 옹호론이 마음에 와닿는다. 이준구 교수는 한국의 폴 크루그먼이라고 불러야 할 듯하다. 크루그먼의 [대폭로]의 한국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한홍구 교수가 쓴 [특강]. 이 책 역시 앞의 두 권과 마찬가지로 읽기 쉽고, 그러면서도 내용은 얻어 갈 게 많다. 읽는 내내 공감가는 부분이 참 많았다. 내용 자체는 여기저기서 한 번쯤은 주워들은 것이 대부분이었던 것도 같지만, 뉴라이트의 기원과 그 정체에 대한 이야기는 새로웠다.
세 권 다 부담없이 읽을 수 있고, 영양가는 많다.
세 권 다 선뜻 추천을 날린다.
4. 검찰 시보를 하면서 매일매일 느끼는 게 참 많지만, 그 중에 몇 가지를 꼽아보자면,
- 경찰 수사권 독립은 시기상조다.
- 수사 단계에서부터 변호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피의자들은 변호인의 조력을 적극 구할 필요가 있다.
- 검찰에서는 아직도 구속을 구속사유와 무관한 제도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 공판중심주의는 너무나도 중요하다.
난 피의자들이 왜이리도 불쌍한지 모르겠다. 아직 악질 피의자를 못 만나봐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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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
2009/05/20 17:51ㅎㅎ 지하철에서 책 읽던 시절이 그립네. 난 출근길이 3정거장 밖에 안되서 책 읽기에는 너무 짧지...퇴근길은 전철 끊겨 택시로..;;
여유없는 평일과 가족과 함께하는 주말로 인해 정말 강인한 의지가 없이는 책 읽기가 참 쉽지 않네. 그나마 최근 읽은 몇 권은 서평도 안 쓴채 기억에서 서서히 희미해져가네.
경찰수사권 독립은 시기상조라는 말은 지당한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검찰이 경찰보다 얼마나 낫나 하는 생각도 드네. 물론 전반적으로는 훨씬 낫겠지만,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사실 차별성이 없는 듯...-
onecent
2009/05/25 22:40검찰에서 직장생활 해 보니까 책 읽는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겠더라..; 주말에든 평일 밤이든 일부러라도 책 읽는 습관을 들여야겠어.
몸에 배면 자연스럽게 될 텐데 말이야..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란 측면에선 별로 차이가 없다는 데는 동의. 난 다만 수사의 초점을 맞추는 점이랄지, 그나마도 적법절차를 지키려고 하는 점이랄지 하는 부분에서는 검찰이 경찰보다 아직 낫다고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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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검찰 수습을 마친 사람들은 하나같이 검찰 재밌다고들 난리지만 난 그냥 시큰둥하다.
아직 검찰 수습은 시작도 안했는데
3, 4월의 자유로움과 여유로움, 대학과 아주 비슷한 그 공기가 벌써부터 그립다.
이제 막 압구정동에 도착해서 짐 풀고 씻고 앉았는데
일산 집의 창을 뚫고 들어오던 햇살이 그립고
오며가며 우연히 마주치던 친구들이 벌써부터 그립다.
검찰 생활이 재미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지나간 날이 아쉽다.
지도검사님이 좋은 분이길 바랄 뿐이다.
아까 오는 길에 눈이 마주친 고양이녀석을 믿어 보는 수밖에.
일년에 한두 번밖에 없는 일이다. 난 원래 머리만 대면 자버리는데...
요 며칠간 히어로즈와 24에 불타오르며 낮밤을 무시해버리던 게 몸에 배었나보다.
그렇다고 기껏 한 시즌 끝내고 또 폐인될까 봐 참고 있는 24를 다시 보기 시작할 수도 없고..
어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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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cent
2009/05/12 21:59그렇게 해볼까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만..
그러다간 결국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는 후반부에 가서 집중력이 떨어짖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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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에게서 독립해 연애와 여행을 하시라"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부모로부터 정서적·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면 자기 객관화를 할 수 없다."
"일단 자기 객관화가 되고 나면 ‘자존감’이 생긴다. 자존감은 자신감과는 다르다. 자신감은 내가 시험 성적이 더 좋고, 더 예쁘고, 내 차가 더 좋구나 하는 식으로 남과의 비교우위를 통해 갖는 특정 능력의 과신이다. 열등감이 꼭 따라다닌다. 모든 면에서 제일 잘난 사람이란 있을 수 없기에 자신감은 다치기 쉽고 사라지기 쉽다."
"일단 집을 나와라. (청중 웃음) 부모들은 그게 사랑인 줄 안다. 최근 직장 잘 다니고 결혼도 멀쩡하게 한 사람이 집 밖에 안 나가고 처박히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학교·직장·결혼 모두 부모가 시키는 대로, 부모가 선택해준 대로만 살아온 이들이다. 이들은 외형은 성인이나 사실은 아이다. 굉장히 슬프고 폭력적인 일이다. 집을 나와야 한다. 스스로 부딪히고 해봐야 한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같지?
"나도 누구 못지않은 스포츠광이지만 국가대표 간 경기를 항상 민족과 국가의 코드로만 읽어내려는 한국 사회의 끈질긴 관성과 승리주의, 국가 간 경기에만 목숨을 거는 경향에 질리고 만다. 김연아 선수는 한국의 국가대표이지만 그의 세계선수권 제패는 우선적으로 김 선수 개인의 뼈를 깎는 노력과 탁월성에 기초한 것이다. 한 개인의 노력의 위대한 결실이라는 점에서 나도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즐거워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아주 빼어난 선수이자 매력적인 인간이라는 점에서도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야지 그것을 자꾸 ‘대한민국의 희망’ ‘자랑스러운 한국인’ ‘2009 국민의 희망’이라는 식으로 국가적 차원의 사건으로 환원하려는 것은 ‘우리’가 국가주의의 블랙홀에 빠져 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WBC 대회 준우승이나 김연아 선수에 대한 보도에서 넘쳐나는 것은 “세계가 놀라다” “세계가 매혹되다” “한국의 저력” “세계가 주목하다” 같은 문구다. 사실은 한국인의 욕망과 다르게 세계는, 일본과 한국을 제외하면, 놀라지도 않았고 크게 주목하지도 않았다. 본선이 열렸던 미국에서도 1단 기사에 그쳤다. 군소 언론, 온라인 신문 및 스포츠 전문 케이블 방송만이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 경기에도 무관심했던 미국 사회의 특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오류다. 김연아 선수에 대한 보도도 거의 매일 열리는 미국 프로농구에 한참 뒤처져 나왔다. 이러한 착각은 평소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민족적 나르시시즘이 작동하는 데서 나온다. ‘한국인의 우수성과 저력’을 국제사회가 인정하길 바라는 욕망은 사실은 열등감의 발로다. 국제 무대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자신감이 있다면 이러한 ‘인정 콤플렉스’는 불필요하다. 불안감이 강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한국인이, 특히 한국 국가대표가 선전하면 세계가 주목한다는 민족적 자아도취에 쉽게 빠지고 만다."
나는 위 글에 거의 전적으로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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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
2009/04/22 13:39Me too.
우리 사회의 국가주의, 결과지상주의, 1등주의가 정말 심각한 듯.
최근 주변의 정말 가까운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도 정말 생각의 괴리를 심하게 느끼는 일이 많네. 내가 삐뚤어진 것인지, 내 환경이 그런 것인지...-
onecent
2009/05/01 21:16형이 비뚤어진 건 아냐.
서울대 경제학과 이준구 교수가 쓴 '쿠오 바디스 한국경제'라는 책이 최근에 나왔는데, 이거 한번 읽어봐봐. 지원군을 얻는 느낌일걸.
저 책, 폴 크루그먼의 '대폭로'를 읽는 느낌이었어. 이준구 교수님은 한국의 폴 크루그먼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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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9/04/30 20:11이런 세상에... 이런 의견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있었다니.
글을 읽으면서 정말 깜짝 놀랐다.
한겨레니까 또 이런 글을 올릴 수 있는 거라는 생각도 들고...
참 공감가는 글이네.
옷가게에 들어가서 청바지를 고를 때 보는 건 일단 두 가지다.
먼저 색깔과 워싱처리된 무늬를 포함한 모양새를 본다. 그리고 나선 마음에 드는 녀석은 가격표까지 본다.
가격까지 마음에 든다면 - 가령 "디젤인데 50퍼센트 세일"이라거나 하면 - 입어보게 사이즈를 찾아 달라고 점원에게 물어 본다(혹자는 캐시미어라면 가격조건은 아예 무시해 버리기도 한다).
아무리 걸려 있는 걸 보고 마음에 들어도, 입어 보고 난 뒤에까지 마음에 드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리고 정말 간혹이지만, 입어 보고 나서 단순히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라, "그래바로이거야"라는 기분이 드는 경우도 있다.
그런 "그래바로이거야" 청바지라고 하더라도, 키는 작으면서 작은 키에 비해 허리사이즈는 크게 입는 나로서는 바지 길이를 줄여 입어야 한다. 잘려나간 바짓단은 도로 이어 붙일 수 없는 일이기에 수선을 맡길 때는 길이를 좀 적게 줄이게 되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한 번 줄여 입고 다니다가 또 한 차례 수선을 맡겨야 하는 일도 발생한다.
길이까지 딱 좋게 줄여서 줄기차게 입고 다니다 보면, 그 바지를 입는 요령이 쌓인다.
배불리 먹었을 때는 벨트를 한 칸 풀어서 채우고, 야트막하고 폭이 좁은 캔버스화를 신을 때는 끌리지 않게 한 칸 조여서 채운다. 길이가 긴 티셔츠에 맞춰서 헐렁하게 입을 때는 내려 입고, 내려 입었다간 허리가 너무 길어 보인다 싶으면 좀 올려 입는다(그러나 어지간해선 허리에 맞춰 입는 경우는 없다).
그렇게 요령이 쌓인 상태에서 계속 줄기차게 입고 다닌다. 그러면 청바지가 몸에 적응하는 건지 몸이 바지에 적응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옷감은 데님인데도 흡사 츄리닝을 입고 다니는 것처럼 편하기 그지없는 상태가 된다.
드디어 입어도 입은 것 같지 않은 궁극의 경지에 도달했나 싶으면, 바로 그 순간
바지가 해져서 찢어져 버리고 만다. 원래부터 찢어서 판 바지가 아니었으니 찢어진 게 보기 좋을 리 없다.
거 참. 요새 바지는 옷감도 튼튼한 걸로 만들텐데 내가 험하게 입는 건지 아니면 불량품인 건지.
그러고 나면 다시 "그래바로이거야" 바지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아니면, 그냥 찢어진 데를 수선해서 입고 다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