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 선샤인

주절주절/영화 Posted at 2006/03/18 23:53

[이터널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에는,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을 골라내 지워주는 '라쿠나'라는 가상의 회사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가슴아픈 일을 겪게 마련인 탓에, 라쿠나 회사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기르던 개가 죽은 뒤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 개를 잊기 위해 기억 제거 시술을 받으려고 하는 노부인부터 시작해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옛 연인을 잊기 위해 회사를 찾은 클레멘타인과 조엘까지.

다시는 꼴도 보기 싫다. 그 사람이 내 머리속에서 사라진다면, 난 더 이상 가슴아파할 일도 없을 것이고, 기분좋게 새 삶을 살 수 있을 거야. 조엘과 크게 싸운 뒤 클레멘타인은 홧김에 기억 제거 시술을 받고, 그 사실을 알고 충격받은 조엘 역시 복수하는 심정으로 클레멘타인을 기억에서 없애 버리기로 한다.

라쿠나 회사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영화에서처럼 손님이 들끓을 게 틀림없다. 괴로운 기억을 입맛대로 골라서 도려내 버릴 수 있다니. 나쁜 기억은 싹 지우고 기분좋은 기억만을 남길 수 있다면 삶은 좀더 행복해질 게 틀림없다.

라쿠나 회사에서 일하는 메리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메리는 명언집에서 본 글귀 두 가지를 외우고 다닌다.

Blessed are the forgetful, for they get the better even of their blunders.
쉽게 잊는다는 것은 축복이다. 실수조차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순결한 수녀의 운명은 얼마나 행복한가! / 세계는 잊는다, 잊혀진 세계에 의해/ 티끌 하나 없는 정신의 영원한 광채! / 기도가 하나씩 받아들여지고, 소망은 하나씩 포기된다.

첫 번째 글귀는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 등장하는 말이다. [선악의 저편]을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저 구절이 어떤 맥락에서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도 기억과 관련해서 몇 가지를 언급하는데, 그는 잊지 못하는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불행한 일을 겪고 나서 그것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 증오심을 키우는 사람들, 니체의 표현을 빌자면 '소화불량에 걸린' 사람들은, 니체가 말하는 강한 자와는 거리가 멀다.

[선악의 저편]과 [도덕의 계보]가 내용이 비슷하다는 걸 생각한다면, 위의 저 구절 역시 비슷한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듯하다. 실수를 저지르고 나서 그 과거의 실수를 계속해서 떠올리며 '내가 왜 그랬을까' '그런 실수를 하다니 쪽팔려 죽겠다' 하는 식으로 괴로워하고 있어서는 결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지나간 일은 어차피 아무리 애를 써도 바꿀 수 없는 법. '쩝. 실수했네. 뭐, 어쩔 수 없지' 하고 툭툭 털어버릴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진정으로 강한 자라면 일부터 털어버릴 일도 없을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냥 잊어버리고 말 테니까.

두 번째 글귀는 알렉산더 포프의 시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에서 발췌한 것이다. 수녀가 된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 대한 격정적인 사랑과 수녀로서 지켜야 하는 하느님 앞의 경건함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자기와는 달리 욕망에 흔들리지 않는 '티끌 하나 없는 정신'에 대해 찬미를 보내는 구절이다. 아벨라르에 대한 사랑을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엘로이즈로서는, 차라리 아벨라르를 잊어버리고 신 앞에 부끄럽지 않은, 욕정에 휘둘리지 않는 깨끗하고 경건한 마음을 유지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클레멘타인과 조엘은,(그리고 메리는) 기억을 지우고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는가? 클레멘타인과 조엘은 서로에 대해 완전히 잊은 채, 그들이 예전에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다시 만나고 다시 서로에 대해 사랑을 느끼게 된다. 메리 역시 기억을 지우기 전과 마찬가지로 하워드 박사를 사랑하게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기억 제거 시술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이하게도 그들이 예전에 살았던 삶의 궤적을 똑같이 따라간다.

이들은 잊고 싶은데도 잊지 못해서 괴로웠던 게 아니다. 그들은 애시당초부터 잊고 싶지 않았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클레멘타인은 조엘을, 그리고 메리는 하워드를 잊고 싶지 않았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을 하나씩 지워갈수록 자기가 클레멘타인을 결코 잊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머리속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게 된다. 라쿠나의 기억 삭제 프로그램은 결국 조엘의 머리속에서 어떻게든 숨으려 하는 클레멘타인을 찾아내 전부 지워버리지만,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보는 순간 뭔가에 홀린 듯이 그녀에게 다시 끌리게 되고, 그건 클레멘타인 역시 마찬가지다. 패트릭과 함께 있으면서 클레멘타인은 끊임없이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는다. 불안해하던 그녀는 결국 조엘을 처음 보자마자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 둘은 자석처럼 서로 달라붙는다.

패트릭은 과거에 조엘이 클레멘타인에게 주었던 선물을 주고, 조엘이 했던 말을 똑같이 따라하면서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지만,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과 같은 말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하는데도 클레멘타인은 패트릭을 거부하고, 과거에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을, 거짓말처럼 단번에 찾아낸다. 이런 게 운명이고, 이런 게 인연인 것일까?

그렇게 서로 다시 만나서,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그들이 기억을 지운 적이 있는지 없는지 전혀 모르고 처음부터 다시 사랑을 시작했으면 그냥 간단히 문제는 해결됐을지도 모른다. 기억을 싹 지워버리기까지 했는데도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다시 만났고, 그처럼 운명적인 사랑으로 엮인 그들, 보기만 해도 전기가 파지직 통하는 그들은 결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다. 그들의 사랑은 영원할 것이다. 영화 끝. 기분좋은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렇게 기분좋게 끝나지 않는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전에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고, 서로 싸우고 헤어졌으며, 심지어 서로를 잊기 위해 기억을 지워버렸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메리가 라쿠나 회사의 기록을 전부 빼내서 시술을 받은 사람들에게 돌려보낸 탓에, 그들은 서로 뭐가 마음에 안 들었으며 어떤 점들이 자신을 화나게 했는지, 왜 싫증이 나게 됐는지...등등, 기억 제거 시술을 받기 전 스스로 녹음해 놓은 목소리를 고스란히 듣게 된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잊고자 했던 과거를 전부 알아버리고 말았다. 이제 막 서로가 너무나 마음에 들기 시작한 차였는데, 돌연 과거가, 온갖 상처와 아픔으로 가득한 과거가, 그 오랜 시간이 무겁게 그들의 머리를 내려쳤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혼란스러워하며 눈물을 흘린다. 시작되려던 그들의 관계는 과거가 되살아남에 따라 이제 끝장이 나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돌아서서 떠나는 클레멘타인을 조엘이 붙잡는다.

Joel: I don't see anything I don't like about you.
난 너한테서 마음에 안 드는 점이 하나도 없어.
Clementine: But you will! But you will, and I'll get bored with you and feel trapped, because that's what happens with me.
그렇지만 마음에 안 들게 될 거야! 그렇게 될 거야. 그리고 난 너한테 싫증을 느끼게 될 거고 갑갑하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왜냐면 난 그렇게 되게 돼 있기 때문이야.
Joel
: Okay.
그래도 상관없어.

Clementine
: ...Okay.
그래.
Joel: Okay.

그래.

그래도 상관없어. 다시 싸우게 돼 있든 말든, 나중에 서로에게 싫증을 느끼게 되든 말든.

이제야말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기억을 지우기 전의 상태로.
지워버린 과거가 되살아났는데도 그 둘은 서로를 놓지 않기로 한다. 그들은 과거를 그대로 끌어안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니체는 '잊어버리는' 자를 강하다고 추켜세운 것이지, 잊지 말아야 할 것, 잊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지워버리고 문제가 해결됐다고 자위하는 사람을 찬양한 게 아니다.
'티끌 하나 없는 정신'이 내뿜는 광채는 창백하다. 그런 건 신에게나 어울린다. 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채 빛을 발하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게 아닐까. 모래알이 뭉쳐서 진주가 되듯이.

그 둘은 이제 다시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비록 시작점에서 끝나지만, 틀림없는 해피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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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8 23:53 2006/03/18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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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넷
    2006/03/31 08:29
    영화감상문만 보고도 이렇게 감동받긴 처음이다.
    이번 주말엔 이터널 선샤인이나 빌려볼까.
    아, 지금 시간에 뭐하는 거냐고? 은행이 아직 안 열려서 기다리는 중이야. -_-
    은행 좀 일찍 열고 늦게 닫으면 안 되나... 쿨럭
    • onecent
      2006/04/02 18:42
      그러고 보니..
      .... 이 글, 엄청난 스포일러로군요 -_-;;;

      은행들은 보통 늦게 열고 일찍 닫는 게 대세인듯. ㅎ
  2. 비밀방문자
    2006/06/08 23:21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onecent
      2006/06/17 23:16
      아이고 이런. 그동안 쓰던 스킨에 최신댓글이 안 떠서 새로 댓글이 달린줄도 모르고 있었네요;

      이터널 선샤인 진짜 괜찮은 영화였죠. ㅎ
      자주 와주시면 저야 고맙죠.
  3. md factory
    2006/10/31 01:14
    와 글 너무너무너무 잘 쓰세요.
    국문학과인데 정말 부러워요. ㅠㅠ 진짜 부럽네요.